정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한 100미터정도 남은 것 같다. 경사면이 가슴에 붙어 스틱을 찍는 거보다 로버트의 스틱자국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가야 할 정도이다. 간간히 바위가 보이며 발로 찍어도 계단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 곳도 있다. 결국 그만큼 더 위험해진다는 얘긴데... 어떻게든 올라야 가겠지만 더 이상은 나 혼자의 힘으로 내려올 자신이 없어 몇 번을 망설이다 로버트를 세우고 도저히 더 이상 못 오르겠다고 하니... 말 한마디 없던 로버트가 처방을 내리는데... 자기가 이제까지 가이드한 등반자 중에서 우리가 최고란다. 그래도 미심치 않아 내리막길에 대한 우려를 내비치자 그 자리에서 발뒤축으로 눈을 푹푹 찍으며 너무나도 안전하다며 깡총깡총 춤을 춘다.
이제까지 우리의 상태를 확인한 모양이다. 이제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대로 진행하다가 내가 불안을 호소하자 배낭속에서 자일을 꺼내 안자일랜의 카라비나에 세사람을 차례로 연결시킨다. 이제 로버트의 손에는 50센티 정도의 피켈이 쥐어져있다. 만일 우리중 누군가가 순간적으로 문제가 일어난다면 저 피켈에 의지해 해결책을 찾으리라... 경사가 많이 심해졌다. 로버트의 말로 70도 정도의 경사라니 거의 직벽과 같다. 마지막 능선을 올라서니 이제 사방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바람이 많은 곳이라 바위위에 눈이 붙어있질 못하고 그래도 틈틈이 눈과 바위가 섞여있으니 위험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병건이가 사진을 찍는다고 고개를 들라 하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다.
Top of Tyrol 샤우펠스피체(Schaufelspitzee 3,333m) 정상을 상징하는 대형 나무십자가가 우리를 반긴다. 사방이 눈에 들어온다. 알프스의 연봉이 파노라마를 이루며 좌측 돌로미테부터 스위스쪽까지 굼실굼실 춤을 추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장면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로버트를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극도의 존경심이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진다. 대장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라고나 할까 뒤를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뒤쪽의 진행상황에 따라 여유있게 줄을 늘였다가 다시 감았다가 하면서 우리를 리드하고.. 공포심을 갖는 선수를 위해 계속해서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잊지 않았던 우리의 대장...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를 보낸다.
십자기 뒤편에는 조그만 메모함이 있어 이 봉우리를 다녀간 등산객의 인적사항을 적어놓는 노트가 있어 병건이와 나는 우리의 등정을 간략하게 영어와 한글로 적어 놓았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백지위에 우리가 올라온 길이 선명하게 샤우펠요흐반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터미널 건물이 성냥갑보다도 작게 보인다. 우리는 이 길을 ‘로버트 루트’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버트도 무척 좋아한다. 장갑을 끼지 않으면 몹시 손이 시린데도 그는 우리와의 미세한 자일의 감각을 느끼기 위하여 맨손으로 줄을 잡고 이곳까지 올라왔다.
하산은 등산의 역순이다. 병건이가 제일 앞에서고 그 다음이 나, 그리고 로버트가 뒤에서 자일을 잡으며 내려온다. 요번에는 올라갈 때 만든 눈 계단을 발뒤축으로 꾹꾹 밟으며 내려오는데... 스패츠가 약간 헐렁하고 등산화를 목이 낮은 것을 잘못 선택해 발뒤굼치부터 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발 전체가 물에 흠뻑젖는다. 절반정도 내려오자 로버트가 우리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자일을 풀고 일렬로 진행하지 말고 각자 루트를 개척해서 내려가라고 해 세명이 각자의 길을 만들며 내려오는데... 드디어 알프스에 ‘성채 루트’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파노라마 레스토랑... 해발 2,900의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우리가 다녀온 산을 배경으로 바이스비어를 마셨다. 5월 15일은 짧은 순간에 만감이 교차하는 날이었다. 죽음까지 생각하는 극도의 공포에서 이제 모든 게 해결된 감격! 우리가 올라간 자리로 스키를 둘러맨 사람이 다시 오르고 있다. 앞에 앉은 로버트의 손이 보이길 레 춥지 않았느냐고 물으며 손을 슬쩍 만졌더니 흠짓 놀란다. 혹시 나를 호모로 착각하는 거 아냐!
'2005유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이치박물관(deutsches-museum) (0) | 2005.08.05 |
---|---|
체코 프라하 Ⅲ(바츨라프 광장) (0) | 2005.07.21 |
체코 프라하 Ⅱ(카를교) (0) | 2005.07.21 |
체코 프라하 Ⅰ (0) | 2005.07.21 |
베르히테스가덴 (0) | 2005.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