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5. 12 마지막 순간까지 크게 기대하지 않고 숨죽이며 진행해온 세 번째 유럽여행이 우여곡절 끝에 시작되었다. 사무실은 함부로 10일간의 휴가를 언급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으나 5월로 접어들며 기관평가도 끝나고, 창립기념일도 끝나며 태풍의 눈처럼 잠잠한데다가 현 정부가 적극 추진중인 공공기관 지방이전의 소용돌이에 연구원이 휘말리며 분위기가 붕 뜨는 상태가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분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집에서 핸드폰의 전원을 끄며 마음이 편해진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당분간 사무실은 잊는다. 즐거운 여행만을 기약하며 이제 출발이다.
13:15분 비행기에 맞춰 9시에 집을 나서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이미 아침 6시에 이번 여행의 동반자인 병건이네를 집에서 픽업해서 서현역에서 공항버스를 태운 상태라 아침부터 바쁘다. 월드컵의 열기가 막 일기 시작할 무렵 삼년 전 두고 온 독일이 그대로 잘 있는지도 궁금하고 이제는 모든 것을 저한테 맡기라는 듯 일정 브리핑도 없는 창기만 믿고 여행을 떠난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1시에 타서 5시에 내린 잃어버린 11시간의 혼돈 속에서 프랑크푸르트(FF) 공항은 예의 거대한 유리 구조물로 우릴 맞이한다.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전까지 LG 유럽 지사장을 지냈다는 양**선생! 본국 발령이 나자 독일에서의 생활을 접지 못해 회사를 포기하고 독일에 눌러 있으면서 창기의 일을 돕기로 했다는 분인데... 우리를 도와주기 바로 직전에 LG에서 마지막 한 일이 독일에 온 구본무 회장의 의전을 맡았다니.. 우리가 너무 거물을 만난는 데... 얌전하게 생긴 분이 내 이름을 들고 기다리다 가는 우리 식구를 보자마자 바로 알아보겠다는 듯이 인사를 건낸다. 우! 창기!! 대단한데...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순전히 우리 가족의 여행편리를 위해서 이렇게 도와주는 분이 계시다니... 고맙고도 감격에 아! 드디어 유럽이 우리를 respect 하는 구만...
독일에서 항상 느끼는 감정으로 실용화 된 기술의 편리성과 보편성! 짐을 실은 구루마를 가지고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에스컬레이터 까지도 오르고 내리고를 마음대로 한다니 신기하기 이를 데가 없는데.. 그 경사에 많은 짐을 실은 무거운 카트를 전혀 사람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 기운 상태로 버틴다. 대단하이! 국제선청사에서 모노레일로 국내선 루프트한자 전용청사로 이동하니 그 지하가 우리가 뮌헨까지 타고 갈 초고속열차 ICE가 오는 승강장이다. 양선생의 배려로 핸드폰으로 창기와 연락하니 에어프랑스로 샤를 드골공항에서 뮌헨으로 온 병건이네 가족은 벌써 도착했단다. 우리가 타야할 기차는 ICE 613 18:54에 FF공항을 출발해서 10시에 뮌헨에 도착하는 초고속 열차. 양선생님에게 송구스럽게도 미리 예약된 기차표를 전해 받고 아직 시간은 30여분 남았지만 서울에서 선물로 가져온 조그만 떡상자를 전해드리고 계속 기차가 올 때까지 계시겠다는 분을 억지로 등을 밀어 들어가시게 하고는 기차를 기다린다.
퇴근시간이라 기차 내부는 컴퓨터를 꺼내 놓고 작업들을 하는 샐러리맨들로 활력이 넘쳐 보인다. 우리 우등고속처럼 널찍한 공간에 의자는 한 줄에 두 칸 한 칸으로 일등석이라 그런지 좌석마다 TV모니터가 달려 있고 기차 천장에 달려있는 대형 문자모니터에는 여러 가지 정보와 함께 지금 우리가 시속 250Km로 달리고 있다고 알려준다. 기차 요금은 기차 운임 226유로와 별도로 좌석 예약요금 6유로를 포함해서 232유로 우리 돈으로 300,000원 이쪽의 물가를 감안하면 탈만한 가격이다.
참고로 서울에서 부산가는 KTX 일등석은 6만원... 차창가로 들판 하나 가득 노란 유채벌판 뒤로 이쁘게 자리 잡은 집들이 어울린 전형적인 독일의 풍경이 저물어 가는 해을 받아 붉게 홍조를 띠며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위기..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영미가 뒤늦은 피곤에 졸고 있는 사이 정우의 아이스크림을 산다는 핑계로 세 칸이나 떨어진 매점 칸으로 옮겨 준비해간 유로를 당당하게 내밀고 아이스크림과 바이스비어를 주문한다.
긴 비행기 여행의 피곤이 남아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행 첫날 약간 설레이는 기차 안에서 좋은 풍광을 바라보며 본고장 맥주를 마신다! (혹시 읽는 분들에게는 미안) 크! 죽이옵니다!! 그때까지는 분위기 좋왔는데... 얼른 정우에게 아이스크림 주고 다시와 한잔 더 먹고 자리에 돌아오니 자는 줄 알았던 영미가 술 냄새를 맡고는 벌써 시작이야! 주-거이씨! 하는데... 옴메 기죽어!
저녁 9시가 넘으니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제 기차안의 승객도 만하임과 슈트트가르트를 지나며 거의 내리고 뮌헨까지 가는 몇몇 승객만 졸고 있다. 아우구스부르크 역.. 이제 긴 여행의 종착역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고 꾸벅거리고 있는 데... 졸다 깨도 기차가 안가고 한참을 지나도 기차가 안 간다. 정시운행을 생명으로 한다는 독일의 최고급열차 ICE가 근 40분이나 연착을 한다. 우리야 어디 늦는다고 연락할 방도도 없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데... 뮌헨역에서 사정도 모르고 기다리는 창기는 정시에 다른 곳에서 도착하는 기차를 우리 기차로 착각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내리지 않자 FF에 있는 양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사람이 오지 않는 다고 난리를 쳤고, FF에서는 기차 태워준다고 그렇게 얘기해도 잘난 척하고 가라고 해서 왔더니 기어이 다른 기차를 탔구나 하는 지레 짐작으로 이 어리버리한 가족이 어디로 갔나하며 보낸 사람 받는 사람이 당사자는 빼놓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뮌헨역에서 감격적으로 창기와 병건이를 만나 집으로 가는 길.. 역과 길이 모두 그대로 이고 MAN트럭 공장과 창기가 애용하는 Enterprise 렌트카 지나 집에까지 모두가 그대로이다. 심지어 집에 도착하자 낯익은 밤색 현관문도 정겹고 차고도 그대로 있다.
차만 BMW에서 벤츠로 바뀌었고 반갑게 맞이하는 은경씨는 이 먼길을 달려 온 사람들을 위해 뼈감자국을 마련해 놓고 저녁을 권한다. 여기 독일 맞나? 창기도 지하 창고를 공개하며 두 종류로 두 짝이나 사다 논 바이스비어를 알려주며 나의 전의를 불태운다. 그래! 서울에서 저거 한 병을 만원씩에 먹었으니 비행기값 벌어보자!
휴가가 아까워서인지 시차가 역으로 작동하는 지 이틀간의 여행과 늦은 밤까지 맥주와 씨름을 했는데도 6시가 되니 저절로 눈이 떠진다. 독일의 3층 방에는 방과 거의 수평에 가까운 2개의 커다란 유리창에 달려 있어 아침 해가 오르면 눈이 부셔 잠을 잘 수가 없다. 창기가 이를 배려해서 창문에 검정 가죽으로 된 찍찍이를 붙여놔 아침잠의 방해를 막도록 해놨는데... 이와는 별도로 숲 근처라 새들이 난리가 아니고 퍼질러 누워 있기기 아까워 정우를 깨워 거실로 나오니 병건이와 현도도 나오고 창기의 아들 동의까지 나와 새벽 산책을 나선다. 앰퍼(Amper)강을 지나 익숙한 숲길로 들어가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애들과 조깅을 즐긴다!
아!!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휴가며 휴식이다. 백조와 오리가 여유 있게 물위를 헤엄치며 커다란 백조는 더 다가서면 사람을 공격할 판인데... 나중에 자세히 보니 알을 낳아 논자리라 긴장한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엔 커다란 슈퍼 앞에 있는 빵집. 10명이 먹을 바께트와 소뿔과 같은 버터 빵을 한보따리 사오는데. 빵집 앞 커다란 게시판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문을 연다고 Mo-Sa 로 되어 있는데 순발력 있는 우리 아들들이 키득거리며 야! 저기 봐! 모사? 응 빵사! 하고 너스레를 떠는 게.. 다들 많이 컷다.
아침부터 창기의 심술이 만만치가 않다. 내가 등산화를 가져오지 않은 게 영 불만인 모양이다. 짐을 가능한 줄이려 했는데... 목까지 있는 등산화 두짝이면 기내가방 하나는 다 찰 텐데... 미국에서 종숙이가 사준 찰고무 랜드로버가 바닥도 탄탄하니 그걸 쓰면 왠만한 트레킹은 다 가능할거라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독일놈들은 어떤 행위보다 그 행위를 하는 준비자체를 더 중하게 생각해 하물며 자전거를 타도 헬맷을 꼭 착용하고 오토바이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는데... 뮌헨 등산장비점과 동네 장비점을 몇 번 오가며 고민하다. 진짜 맘에 드는 비브람창에 등산화에 자꾸 눈이 가는데... 백두대간을 하면서 목이 높은 고어택스는 발에 맞는 게 집에 있고 실제로 필요한건 주변 산용 발목이 낮은 경 등산화가 필요해 몇 번을 고민하다. 아디다스사의 계열사로 세계적인 스키용품 전문브랜드인 살로몬 등산화로 하나 샀다. 결국 영미 이야기로는 독일와 새 등산화 살 요량으로 집에 두고 안가져 왔다나? 귀신이 내 맘을 다 읽고 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바이헨쉬테판(?) 오전에는 자동차를 빌리고 여자들 쇼핑을 에스코트 하며 잠시
휴식을 한 후에 저녁에는 창기의 독일측 파트너인 랑거의 후버사장의 딸과 사위인 미카엘과 알렉스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곳이 바로 뮌헨공항에서
가까운 프라이징(Freising)지역에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인데... 바이얀쉬테판(Weihenstephan)에서는
1040년경부터 수도승들이 양조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뮌헨공대의 양조공학과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을 앞으로 하고
약간 구릉지대에 자리 잡은 바이헨쉬테판은 낮에 뮌헨주변을 다니면서 구경했던 거대한 하얀색 타이어 모양의 2006월드컵 주경기장인 알리안츠
아레나가 가마득히 멀리 손톱처럼 보였다. 관건은 맥주 맛... 내가 좋아하는 1리터짜리 무거운 유리잔에 거의 위스키색이 나오는 걸죽한
바이스비어의 맛과 향은 정통 독일식 족발인 학세와 함께 으ㅡ 죽인다.
알프스 가는 날 창기의 벤츠에는 창기가 운전하고 그윽하게 여자 셋이 수다를 즐기고 내가 운전하는 우리 차에는 병건이와 함께 꼬맹이 넷을 다 몰아넣으니 차가 길을 떠나 산으로 간다. 마침 방학이 시작되는 토요일이고 10월부터 시작된 우중충한 겨울시즌이 지나고 우리가 도착하면서 시작된 해가 나오기 시작하는 계절이라 이런 날에는 유럽 사람들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디론가 가야하는 관계로 휴양지인 알프스 방향은 만원인 상태... 우리도 가미쉬쪽 보다는 잘즈부르크 쪽으로 우회하여 인스부르크로 길을 잡았다. 지난번 왔을 때 빌린 아우디는 아우토반에서 시속 220까지 달릴 수 있었는데... 이번에 빌린 르노 시닉(Scenic)은 7인승이고 아무래도 힘이 딸리는 지 170이상은 나가지를 않는다. 인(Inn)강을 끼고 인스부르크에 가까워지자 석회지대 특유의 옥색 물빛이 눈을 사로잡는다.
3년 만에 다시 와보는 ‘유럽의 다리’ 알프스의 장미라는 티롤의 주도 인스부르크를 지나 오스트리아와 이태리의 국경 부근으로 이곳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스투바이(stubai)... 일년내내 스키를 탈 수 있어 전 세계 스키어들에게 잘 알려진 이곳은 만년설이 있는 곳이라 빙하(stubai Glacier)에서 스키를 타는 꿈의 고장으로 오스트리아 관광청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창기가 미리 예약해 놓은 우리의 bergjuwel 호텔은 전형적인 티롤풍의 호텔로 70살은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가 하이디처럼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우리를 맞이하는데... 내가 가방을 들려하자 황급하게 얼굴을 정색하고 자기는 아직 스트롱 하다며 배낭이고 가방이고 메고 들고 가는 바람에 졸지에 젊은 놈이 빈손치고 올라가기가 어색하기만 하다.
꼬맹이들은 벌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향하고 병건이 내외(사실 병건이가 내일 더 깜짝 놀라게 하려고 창기가 병건이를 일부러 빼고 우리끼리 감)가 애들을 맡는 동안 우리는 요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알프스 등정을 알아보기 위해서 스투바이 스키장의 뮤터베르그 반하우스까지 올라가는데... 빙하의 계곡답게 사방으로 수백미터짜리 폭포가 떨어지고 길 자체가 장관으로 겨울철에는 길옆이 모두 크로스컨트리 스키장이란다.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는 스키장 곤도라 매표소 앞 가는 비가 뿌리는 가운데 머리 위로는 사방이 구름으로 가리워진 신비의 산...해발 3,333m의 Top of Tyrol 샤우펠스피체(schaufelspitze)의 위용을 그저 멍하니 입간판 지도로만 감탄 하고 돌아와서는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창기 몰래 병건이를 데리고 다시 그곳으로 갔다. 내심 저기를 어떻게 가냐? 그냥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나는 야트막한 곳에 소나 말 옆으로 트레킹이나 하면서 맥주나 먹지... 하는 심산인데 그래서 등산화도 안 가져왔었는데... 5월임에도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사방은 구름속으로 도저히 등산 할 분위기가 아니다. 일단 5시에 낼 우리를 안내할 등산 가이더가 오면 그 사람과 일정을 협의해야 한다니 이곳 상황을 전혀 모르는 우리끼리 고민할 일이 아닌가보다.
호텔에 돌아오니 창기는 병건이에게 비밀인데.. 알려주었다고 투덜대고 지하에 있는 사우나가 남녀공용이라 우리 일행 중 부인네 누군가가 들어가 있는데... 외국인 남자가 훌러덩 벗고 들어왔다고 해서 자못 긴장했는데... 그럴 경우 촌티 내지 말고 상대방의 거시기한 부분을 뚜렷하게 처다 보면 변태고 자연스럽게 위쪽을 바라봐야 한다는데... 나같이 안경만 벗으면 눈뜬 봉사는 좋은 구경이 있더라도 보이는 게 없고 혹 자세히 볼라고 눈 들이대고 초점 맞추려 인상 쓰면 뺨맞기 십상이라 포기하는 게 낫겠다. 잠시 조는 틈에 가이더가 다녀갔는데... 지금처럼 일기가 불순하면 아무산에도 올라갈 수 없고 우리는 준비도 부족하니 낼 아침에 안자일렌 안전밸트와 겨울용 장갑, 스패츠, 스틱 등 우리 장비를 가지고 다시 오기로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