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3. 8. 3 03:45∼13:00(20Km, 9시간15분) 산행구간 :
중산리-로타리산장-천왕샘-천왕봉(1,915)-통천문-제석봉(1,806)-장터목-연하봉(1,667)-촛대봉(1,703)-세석산장-칠선봉(1,576)-선비샘-벽소령-음정 날씨
: 쾌청
두주전 비가 오는 산행이었지만 성삼재에서 벽소령 길은 비교적 수월하였다. 하지만 오늘 하는 중산리에서 음정 길은 하산로까지 20K에 이르는
길이고 한라산을 제외하곤 남한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라 상징성도 있지만 그만큼 힘도 든다. 군데군데 여러 번 산행한 기억도 있지만 10여년 전의
일이라 새롭게 오르게 될 지리산 종주가 그만큼 기대되어진다. 저번 하산길에 듣기로는 음정에서 군사도로로 접근하여 벽소령부터 시작하는 걸로 되어
있었으나 설핏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 길이 아닌데... 버스가 주차장에 들어서니 막걸리 집이 연이어 있는 게 중산리 주차장이다. 버스타면서
늘보에서 나누어준 고도표를 보니 중산리 500에서 천왕봉 1,915까지 가파른 오르막이라 오늘 산행의 힘겨움을 미리 짐작하고도 남겠다.
03:45 예전에는 입산시간을 통제했는지 이대장님이 통제여부를 확인하고는 바로 입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대간팀은 아니지만 지리산 종주를
위해 늘보대원이 되신 분들이 몇몇 눈에 보인다. 매표소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먼저 시작하려는 대원들이 앞에 서려고 웅성거리고 있고.. 인원을
통제하고 출발을 시키려는 이대장님이 앉아 번호를 시키는데... 이거 군대 제대하고 처음 해보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누군가도
투덜거린다.
비로소 백두대간의 첫 들머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비록 몸은 궤방령까지 갔다 왔지만 늘 한구석엔 제대로 다 이어서 하지 않았다는
자격지심 비슷한 게 있었는데... 여기서부터 휴전선이 가로막는 진부령 그곳까지... 내처 기회가 생긴다면 백두산 상상봉까지 반듯이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해 본다. 칠흙같은 어둠속으로 해드랜턴의 행렬이 꼬리를 문다. 우리 일행만 46명 대식구다. 법계교를 건너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계단길에 경사가 붙는데. 전반적으로 산에서, 특히 지리산처럼 국립공원으로 잘 정비된 산에서 길이 경사가 붙으려면 계단이 나타난다. 또
일반적으로 등산객은 계단 길에 약하다. 힘이 들기 때문인데... 우리 일행의 진행이 더뎌진다.
보통 대간길에는 우리 일행의 진행과 산행을 같이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거의 볼 수 없다. 더구나 이제 10회에 가깝게 숙련된 선수들이라
앞에서 대장님이 조금만 페이스 조절을 하면 이 시간에는 전체가 빠른 속도로 다같이 진행 할 수 있다. 그러나 휴가철의 지리산은 숙련되지 않은
많은 등산객들이 우리의 진행을 더디게 한다. 잠시 후 숨이 턱에까지 차.. 쉬기 위해 길을 비켜준 20여명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단체 일행이
이제까지 우리의 길을 더디게 했는데... 한결같이 손에 랜턴을 들고 운동화에 젊음이 유일한 무기지만... 숨이 차는데는 장사가 없다. 40여명의
일행이 모두 해드랜턴을 비추고 산행을 하니 느낀 게 있었는지... 한 학생이 "우리도 탄광에 가서 하나씩 가져오자"하고 농 비슷하게
까부는데... 아버지 같은 어른에게 말조심하라고 한마디하려다 참았다. 참 좋을 때다....
05:40 로타리산장. 길이 야트마한 능선으로 오르는 듯 하면서 발전기 소리가 사방을 진동하며 연료타는 냄새도 나고... 조용한 산에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기 위하여 또 다른 하나를 잃어버리는 듯 해서 서운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유명한 법계사 코앞이라 더 경건해야 할
분위기인데... 언제 산행을 시작했는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산장옆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산장 샘물로 시원하게 속을 다스리고.. 이제 랜턴을
벗어도 될 정도로 날이 훤해지고 있다. 이 깊은 심산유곡에 다른 곳에서라면 이시간에 새들이 아침인사를 하느라 난리일텐데... 희안하게도 소음이
시끄러운 곳이라 그런지 이제 산장의 소음이 안 들린지 한참이 지났지만 새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다. 개선문을 지나면서 이제 발밑이 보이기 시작하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며 거의 다 올라온 분위기인데... 우연히 뒤돌아본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며 장엄한 천왕봉의 일출이 솥아 오르고 있다.
황급히 사진기를 꺼내 담아내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누구한테라도 소리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하느님, 조상님 감사합니다!!!
<천왕봉 일출>

06:20 천왕샘. 천왕봉 바로 아래 아무 것도 없는 1,900미터 돌틈에서 물이 솥아 나오고
있다. 큰 겁은 들어가지도 않고 작은 컵으로만 겨우 한모금씩 마시게 나오는 데... 초면에 아들 물을 떠주던 아주머니가 당신도 마시기 전에
나부터 권한다. 너무도 감사합니다!!. 이제 가파른 계단 길.. 우연히 머리를 드니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오며 나도 모르게 저절로 외쳐진다.
야! 민홍식!! 어떻게 이름이 기억나는 지도 모르겠다. 30년전 중학교 동창. 대학때 마지막보고 안 만났으니 25년은 됐는데... 그것도
천왕봉에서 만나다니... 너무나 반가워 감격스럽다. 김과장님 먼저 가시라고 하고 지난 세월을 잠시 헤야려 보다가 서로 연락처를 확인하고
헤어졌다. 생각해보니 오늘 천왕봉 산행은 네게 너무도 많은 선물을 안겨 주는 듯 하다. 천왕봉 일출에 천왕샘의 신비한 물, 헤어진 옛친구,
중산리 계곡의 운해까지..... 행복하다.
06:45 천왕봉(1,915). 민족의 영산 지리산의 상상봉이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는 정상석이 이곳이 의미하는 바를
알려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사방이 모두 발아래 있다. 세찬 바람이 불지만 너무나도 화사한 날씨에 3시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제 본격적인 종주가 시작된다. 수많은 지리산의 산과 골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07:15 통천문. 바위속으로 길이나 있어 천왕봉을 향해 하늘과 통하는 문이라고 지어진 이름 같으나. 나는 천황봉에서 내려가고 있으니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문이 되는데... 그러면 통지문(通地問)인가 ?
07:30 제석봉(1,806) 천왕봉 옆에 있는 바람에 대접을 못 받아서 그렇지 지리산 제2봉이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 간다는 주목의
고사목이 이색적인 풍경을 보여주는데. 설악 소청에서 희운각으로 내려오는 급경사에 있는 고사목이 이곳 제석봉에는 너른 평원에 펼쳐있는데.
불행하게도 30여년 전에 사람이 불을 놓아 이렇게 됐다니... 공비 토벌한다고 수난, 도굴꾼이 불 놓아 수난, 지리산의 계속되는 수난이
안쓰럽기만 한데... 우리 같은 등산인의 발길에 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해야 하겠다.
<제석봉의 고사목과 사슴>

07:45 장터목산장. 워낙 지리산이 유명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오르는 산이다 보니 능선이에 15분 간격으로 이름난 장소가 많기도 하다.
유럽풍의 산장 옆에 삼삼오오 나무 테이블에 모여 식사나 차를 마시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아 보이는 게 사진으로 찍어 여기가 알프스라 하면 믿을
수밖에 없겠다.

08:50 촛대봉(1,703) 장터목에서 야트막한 오르막 연하봉(1,730)을 지나 촛대봉에 이르는 길은 말 그대로 능선길로...
천왕봉에서 이곳까지 길이 너무 넓게(?) 잘 나있어 숲은 고사하고 작열하는 한여름의 햇살을 피할 길이 없다. 그래도 촛대봉 바위 위에 앉으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천왕봉에서 이곳까지 온 길이 안내판으로 설명되어 있고, 여기서 노고단까지의 능선길이 굽이치고 있다. 특히 발아래 아담하게
자리잡은 세석평전의 산장은 오래전에 본 킬링필드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존 레논의 이메진이란 노래가 흐르고.. 주인공 디트
프랜이 베트콩 치하의 정글을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태국의 난민촌이 보이는 언덕에서 이제는 다 왔다!.. 편안하게 쉴 곳이 생겼다는 그
느낌인데...

09:10 우리는 갈 길이 남았지만 5시간의 연속된 산행과 뜨거운 태양을 피해 산장의 그늘 속에서 내친김에 30분 정도 푹 쉬었다.
윤대장님의 막걸리로 공식 산행주를 하고, 너무나도 시원한 세석의 샘물로 물통도 보충하고, 일어서려는데 이선생님이 도착하신다. 잠시 더
휴식하며.. 천왕봉에서 정상주 하시고 내 몫이라며 친구 홍식이와 얘기하며 늦게 도착해서 못 마신 이여사님이 주셨다는 매실주를 주시는데... 내가
"아니 저한테는 반갑다고 인사만 하시고 이선생님한테는 따로 매실주까지 주셨습니까" 했더니.. 이선생님이 "그것도 몰라! 아무나 주게!!" 하셔서
다같이 웃었다. 세석산장도 옛날에는 많이 아래쪽에 있었는데.. 주 능선상에 이쁘게 새로 지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잔돌이 많은 평원이라 길도
돌로 만들어 놨는데... 이제는 다리가 아퍼 흙길이 훨씬 반갑다. 그래도 일부 구간은 귀한 슾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나무로 길을 만들어 놓기도
했는데.. 국립공원 관계자들이 자연의 모습을 보전하며 가꾸려는 노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10:25 칠선봉(1,576) 세석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영신봉(1,691)을 넘어 하산중인데 하얀 얼굴에 너무도 곱게 늙으신 어르신이
예전에 예식장에서 원판사진 찍을 때 쓰던 구형사진기를 무릎에 놓고 쉬고 계시는 모습이 하도 좋아 보여 윤대장님에 실례지만 연세를 여쭈니
맙소사!!! 87세라고 하시는데... 다들 깜짝 놀라 내려오면서 한마디씩 대단하십니다!
11:05 선비샘. 덕평봉(1,521)을 내려서면 선비샘이 나온다. 수량도 많고 맛도 시원한 게 좋다.중산리에서 이곳까지 거의 30분마다
샘과 산장이 나와 크게 물 걱정은 안해도 된다. 선비샘을 지나면서 도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면서 좌로는 깎아지르는 급경사에 석축을
쌓은 흔적도 보이고.. 이곳도 군사 작전도로의 일부인가 보다
11:50 벽소령..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도착이다. 중산리에서 시작한 대간길이 8시간을 넘겨 벽소령에 도착했다. 이제사 우리 산악회의
대간길은 대덕산 덕산재까지 이어졌고, 나와 김과장님은 두 구간 더해 궤방령까지 이어졌다. 이제 피곤이 엄습하지만 벽소령에는 방학을 맞은 초등학교
꼬맹이 등반대 수십명이 의자며 바닥이며 앉아 컵라면으로 점심을 하고 있어 어디 앉아 쉴 분위기가 아니다. 바로 음정으로 하산해 적당한 곳에서
쉬려고 한참을 내려오니 거의 음정에 다 내려와 오른쪽으로 계곡이 흘러 들어간다. 배수로 공사로 바위가 아직 제자리를 잡지 않아 무너져 내리는
길을 조심스레 10여미터 내려가니 김 과장님과 두 사람에 쉴만한 자리에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허겁지겁 발을 넣으니 너무나 발이 시려워 잠시도
담구고 있기가 힘겨운데... 위쪽으로 숲이 가려져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은 곳이라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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