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대청봉에 첫눈이 내린단다.
미리 춘천에 도착해 코스도 확인하고 여유 있게 컨디션 조절도 하고 싶었는데... 우리의 뭉치 병건이가 내 바램을 호락호락 들어줄 리가 없다. 토요일 오후 상암경기장에서 회사에서 주최하는 고객초청 음악회가 열리는 바람에 9시 이후로나 출발이 가능하단다. 어쩌겠냐! 일이라는데!...
대회 전 날 탄수화물 섭취를 늘여야 한다고 점심에 국밥에 바로 자장면 한 그릇 추가로 먹고 배가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명이의 성화로 청국장으로 저녁 먹고 배가 불룩한 게 산(山)만하다. 게다가 떡까지 추가...
9시 넘어 가락동에서 합류하여 주마간산으로 코스 훝고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1시, 싸늘한 공기가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급격히 떨어진 기온은 0.5도 낼 뛸 일이 엄청 부담으로 다가온다.
아침
푹 자 컨디션이 좋다. 맛있는 순대국으로 아침하고 출정채비를 차리고 택시를 기다리는 데 그랜저 승용차가 우리 앞에 멈추며 같이 마라톤 참가자라며 우리를 운동장까지 태워준다. 조짐이 좋다. 10시가 넘으면서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따사롭다. 마라톤하기 최적의 날씨다.
축제
내 목표는 완주, 재수가 좋으면 4시간 40분...장갑속에 5키로 단위로 시간을 적은 종이를 코팅해서 보면서 달리기로 한다. 형형색색 마라톤 차림을 한 21,000명의 선수 그리고 스탠드를 꽉 메운 가족과 대회 관계자, 운동장을 빙빙돌고 있는 취재용 헬리콥터에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 그야말로 축제다.
출발
11시. 앞에서부터 좁은 문을 통해 세상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간다. 드디어 내 차례 오른발에 찬 기록칩이 스타트라인에 반응을 한다. 이제 시작이다. 운동장을 나오면서 3.5K 까지는 힘겨운 오르막 1키로까지 6분10초 적당한 시간이다. 무조건 천천히를 다짐하며 오버페이스를 경계한다. 오르막 정상에서 병건이를 먼저 보내고 더 속도를 늦춘다.
5키로
숨도 안차고 5키로 기록이 30분27초 어라 4시간40분에 뛰려면 35분에 뛰어야 하는데...4시간20분에 뛰는 기록인 30분49초 보다도 20초나 더 빠르다. 더 늦춰 뛰기도 곤란한데... 하여튼 그래도 천천히... 6분이 지나며 춘천호반이 보이기 시작하며 터널이 나오자 다들 괴성을 지른다. 힘이 펄펄 넘치는 주자들이 다들 나를 앞질러 간다. 그래! 가라 가! 얼마든지 앞질러 가라! 7키로는 의암댐 구도로 다리... 호수 좌우로 삼악산이 보이고 단풍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 잠시 췌장암으로 고생하가다 이주일 전에 고인이 된 옛 동료의 명복을 빌어본다. 그 사람의 쾌유를 빌자고 풀코스에 도전했는데... 하늘에서나 나의 선전을 기원해 주겠지...
10키로
목표는 1시간9분인데... 59분06초에 뛰었다. 병건이가 35키로까지 어떡하든 가면 그 뒤로는 걷거나 뛰거나 한다고 했는데... 거기까지 갈 수 있을라나? 동네 꼬마들이 파이팅을 외쳐주고 음식점아줌마는 아예 노래방기계를 도로쪽에 틀어놓고 “여러분! 여러분들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쟁이들입니다”하고 연신 목이 터져라 쉰 목소리로 괴성을 질러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도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며 힘내! 힘! 하시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양반들이 힘을 내셔야 할 것 같은데...
15키로
1시간28분17초 벌써 1/3이나 왔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키로 마음을 다잡고 물을 찾으니 급수대의 여자 중학생들이 물 따르랴, 파이팅 외치야 바쁘다. 바뻐! 아직도 몸에 힘이 남아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20키로
1시간58분07초 사물놀이 장단패들이 흥을 돋운다. 멀리 급수대가 보이자 서둘러 파워젤을 짜먹는다. 시큼털털한 맛이 벨루지만 그래도 이걸 먹어야 5키로를 간다니 먹을 수 밖에... 20키로 에는 찰떡파이 3개와 게토레이를 들고 길 한편으로 나와 부지런히 찰떡파이를 먹으며 스트레칭을 한다. 도저히 목이 메서 달리면서 먹을 수는 없겠다. 두 개 먹고 한 개는 허리쌕에 넣고 다시 출발...
예전에는 없던 춘천 가는 다리가 새로 생긴 곳으로 포기하면 오른쪽 다리를 건너면 되겠지만 나는 아직도 반 이상 남아있어 딴 생각 할 겨를이 없다. 어떻게든 35키로를 깨 부셔야 걷든 기든 수를 낼 거 아닌가.
25키로
2시간30분52초 누런 들판의 황금벼가 나를 반기는 게 눈에 들어오고 아직도 나는 잘 달리고 있다. 호수 반대편에 10키로 앞선 지점에 싱싱 달리는 고참선수들이 엄청 부럽다. 아마 하명이도 저 속에 포함되어 달리고 있으리라...이제 길은 댐을 향해 살살 고도를 높이고 있다. 댐 건너 반대편은 시가지가 시작되므로 아무 곳에나 실례를 하기 힘드니 댐 오르막 산비탈에 세 명이 한꺼번에 실례를 한다. 으~~시원하다. 댐 초입에 군인 아저씨한테 액상 파스를 받아 무릎에 바르니 춘천댐 시원한 바람이 나를 반긴다. 멀리 호반을 끼고 왼쪽으로는 나보다 먼저 간 이들이 오른쪽으로는 나를 따라 오는 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내가 G 그룹인데... 내 뒤에 H, I, J, K 4시간 풍선이 모두 나를 앞서간다. 그래 앞서가라 얼마든지... 나도 내 두발로 따라가마!
30키로
3시간1분32초 4시간40분 목표보다. 18분이 빠르고 4시간20분 보다도 3분이 빠르다. 아직도 몸에 힘은 있으나 서서히 피로가 오기 시작한다. 아스팔트 바닥에 화천방향을 알리는 페인트 글자의 미묘한 높낮이가 발에 거슬린다. 글자가 없는 곳만 골라 밟는다. 으! 민감성... 포장도로의 중앙선은 양쪽에서 별도로 포장공사를 해서 약간 움푹 들어가 있는데... 이도 거슬린다.
남자 중학생들이 바나나를 하나씩 갈라 내놓는 쪽쪽 집어가 버리니 힘드는 모양이다. 계속 힘들다고 투덜투덜 그도 그럴것이 한시간 반 동안을 숨 쉴틈 없이 내놓아야 하니 힘도 들겠지... 하지만 앞으로 두시간 이상 더 내놓아야 할텐데...나도 이제 힘이 든다. 102보충대 입구에는 군악대의 연주에 힘을 받는다. 호수 반대편 20키로 지점에서 부지런히 오고 있는 달림이들을 보니 더욱 힘이 솟는다. ㅎ 흐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 ‘내가 저 자리라면 자살한다’ 머릿속이 극단으로 단순해지고 군부대 옆을 지나니 자꾸 옛날 군대용어가 생각난다. .
35키로
3시간33분52초 이제 내가 육체적인 노력으로 올 만큼은 다 왔다. 이제 부터는 내 정신이 가야 할 몫만 남았다. 마지막 파워젤을 하나 까먹고 구호를 외치며 달린다. ‘걸으면! 안된다!!’사람들이 많이 응원을 하지만 너무 힘이 들어 대꾸할 수가 없다. 소양댐으로 올라가는 삼거리 너른 곳에 양손에 스프레이 파스를 든 자원봉사자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나도 염치 불구하고 그중에 한곳에 서서 무릎도 뿌리고 뒤도 뿌리고 휘날리는 스프레이에 잠간 동안에도 눈뜨기조차 힘든데... 계속해서 하자면 이 봉사도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는 사이 50을 넘긴 먼 삼촌을 만났다. 번호가 8,000번대 이니 잘 뛰는 선수인데... 최근 연습을 안했다며 먼저 가라고 성화다 1키로 씩 꺽으며 영미와 정우에게 힘을 달라고 계속 외친다. 걸으면 안된다!... 걸으면 죽는다!! 1키로가 죽어도 안 나온다. 딱1키로 였음 좋겠다 싶은 거리는 두 배 이상 가야 나온다.
소양교
이제 사람이 뛰는지, 귀신이 기계적으로 뛰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중에 사진을 보니 V자로 손 흔들고 난리가 아니다. 쥐가 날라고 하고 소양교부터 터미널까지 이어지는 춘천역 외곽도로는 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이 더 많다. 절대 안 나타날 것 같은 터미널 앞 횡단보도를 경찰들이 통제해 주고 나는 유유히 40키로에 도착 마지막 음료수를 마시는데 긴장이 풀리는 지 막 쥐가 날라고 한다. 요가에서 배운 호흡과 함께 쥐를 다스리며 살살 뛰어간다. 같은 동네의 1층 형님이 처방해준 쥐 방지용 테이핑이 큰 힘을 발휘했다. 춘천 대회참가의 훈련 목적으로 두 주 전에 참가한 분당마라톤 하프코스에서도 다리에 쥐가 나 곤혹을 치뤘다.
40키로
이제 공설 운동장이 눈에 보인다. 연도에 응원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 걸을 수도 없지만 40키로 부터는 ‘X으로 뭉개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군대용어가 생각나 ‘ X으로! 뭉개자!!’를 4박자에 맞춰 계속 외쳤다. 운동장에 진입하니 3시간 27분의 우수한 기록으로 꿈의 제전 보스톤마라톤의 참가기록을 달성한 하명이가 반갑게 맞이한다. 축하한다! 싸부!!
근데. 이게 왠일이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영미가 양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게 아닌가! 정우땜에 절대 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차타고 여기까지 오다니... 순간 ‘영미야!’를 외치며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폭 쏟아진다. 너무 감정이 복바쳤나? 영미를 지나쳐 직선주로로 나오니 다리가 허공을 차는 것 같더니 쥐가 나기 시작한다. 평소 경험으로 철부덕 앉으면 온몸으로 경련이 퍼지니 호흡을 가다듬고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질질 끌다시피 트랙을 돈다.
드디어 피니시라인
4시간21분33초
영미를 껴안고 감격에 겨워 다시보고 또 보고 우리 마누라가 이렇게 이뻣나?
병건이가 들어오고 김영동과장님이 들어오고 하명이랑 모두 완주메달을 걸고 사진을 찍었다. 우린 모두 승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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